지금까지 기자카페에 3개의 글을 올렸는데요, “내용이 너무 도덕책 같지 않느냐”는 주변의 지적이 조금 있었습니다. 이번엔 조금 소프트한 얘기를 전해드릴까 합니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본 사나이의 사랑얘기입니다.
재작년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기억하세요? 양조위와 장만옥이 주인공으로 나온 유명한 영화죠. ‘화양연화’라는 말은 ‘한 여자의 일생에서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하는데요, 왕가위 감독에게 이 말은 영화 제목으로 사용할 만큼 큰 모티브를 줬나 봅니다. 같은 의미의 대사는 왕가위의 1995년 작 <동사서독>에도 잠깐 나옵니다. 영화 말미, 병들어 죽어가는 중년의 장만옥이 젊은 시절 강호 무림에 나서기 위해 자신을 떠났던 장국영을 회상하는 장면이죠.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그 사람은 곁에 없었다”라고 말하며 허무해 하는 장만옥이 기억납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2년 전 사귀던 여자에게 버림을 받은 남자가 한 명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년 이상 떠난 여인을 못잊고 괴로워 하다가, 몇 달 전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결심하니 떠난 여인이 더 보고 싶어지더랍니다. 꼭 한번만, 잠깐이라도 보고싶다고…. 쑥쓰러워서 사랑한단 말을 하지 못했던 게 가슴에 맺힌다고….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뭔가 달랐을 거라고….
며칠 전 이 남자는 제게 전화를 걸어 자기를 떠난 그 여인을 봤다고 했습니다. 운전 중 신호대기로 서 있을 때 우연히 고개를 돌려 옆 차를 봤는데, 바로 그 여인이 앉아 있더랍니다. 남자는 “너무 놀라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지더라”는 말로 당시의 기분을 설명하면서 “봤더니만 나를 만날 때보다 많이 못생겨졌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 일을 계기로 과거에 대한 애틋한 아쉬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보다 덜 예쁘게 변한 그 여자를 보고 ‘저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는 내가 곁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그걸로 모든 걸 만족할 수 있었다고…. 이제 편한 마음으로 새로 만난 약혼녀에게 갈 수 있겠다고….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을 만나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지길 바란다고…. 저는 “에이~ 그게 뭐야. 가짜 화양연화 같다”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 사람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더군요. 사랑했던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엔 내가 곁에 있었노라…. 그 말을 몇 십번이나 되새겨봤습니다.
결국 오늘 궁금한 걸 못 참고 그 남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과거의 여인을 마음속에서 지운 건 좋은데, 사랑한다고 말 못했던 것도 후회가 없냐”고 제가 물었죠.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전엔 사랑이란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든 안하든 차이가 없어. 사랑이 말 한마디로 영원해질 수 있나.”
사랑한단 말 한마디 못해보고도 사랑에 달관(?)하게 된 사나이의 얘기는 여기까집니다. 쓰고 나니 별로 소프트하지 않네요.
출처 : 일간스포츠의 맹준호의 세상 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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